
교토의 은각사(銀閣寺) 근처에는 13세기 후반 불교 사찰인 난젠지(南禅寺) 부근에서 흘러내리는 좁은 운하를 따라 나 있는 평행한 길이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히에이산, 서쪽으로는 교토대학교와 가모가와, 동쪽으로는 "동쪽의 산"이라 불리는 히가시야마가 있습니다. 철학의 길, 즉 테츠가쿠노미치(鉄學の道)에 다다르면, 어느 방향으로든 짧은 산책을 통해 격동적이고 영광스러웠던 과거로 향할 수 있습니다.

벚꽃 시즌 동안 일본 교토의 철학의 길
15세기 후반, 쇼군 요시마사가 권력에서 물러나 일본 미학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건립하기 위해 물러났을 때, 그는 교토 외곽 히가시야마 다이몬지 산 기슭의 조용한 곳을 택했습니다. 그는 이곳을 긴카쿠지(은각사)라고 불렀는데, 서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할아버지의 빛나는 금각사(킨카쿠지)를 좀 더 소박한 형태로 개칭한 것이었습니다. 숲이 우거진 히가시야마의 "빌려온 풍경"은 난젠지에도 마찬가지로 사색적인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난젠지는 종종 파괴되었다가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니시다 기타로가 교토제국대학(현 교토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전기 작가인 유사 미치코는 그의 저서 『선과 철학』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매일 산책을 하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은각사(긴카쿠지)뿐만 아니라 경치가 아름다운 호넨인과 난젠지 지역까지 걷는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1 그것은 1910년의 일이었고, 1928년 은퇴할 때까지 니시다는 문자 그대로 데츠가쿠노미치(철학의 길)로 알려지게 된 길을 걸었습니다. 오늘날의 여행 안내서와 지도에서는 이 길을 "철학자의 길" 또는 "철학의 길"로 표현하는 경우가 가장 흔하며, 각각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니시다는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철학자 그 자체였습니다. 교토 학파라고 불리게 된 사상의 주역이었던 니시다는 일반적으로 일본 최고의 철학자라는 데 동의합니다. 대중적 지식인으로서 그는 결국 전시 일본의 민족주의 정치에 불안하게 끌려들었습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독일에 있던 일본 학생들은 니시다의 저작을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저명한 철학자들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민족주의라는 오점, 니시다의 악명 높을 정도로 난해한 언어와 개념, 그리고 그의 방대한 저작을 유럽 언어로 번역하는 데 드는 느린 속도는 그가 일본 밖에서 일류 철학자로 인정받는 데 지장을 초래했습니다.
니시다가 "철학의 길"을 걸었다고 말하는 것도 적절합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유럽 동시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을 흡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순히 학생과 동료들에게 서양 철학을 설명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중국과 일본 고전, 그리고 선(禪)의 수행이라는 비옥한 토양에서 싹을 틔운 일본 철학에 서양 철학을 진정으로 접목시켰습니다. 니시다는 르네상스적 감성을 지닌 사람으로, 선(禪)의 수행과 함께 선대 위대한 사상가들의 전기를 탐독했고, 항상 최신 과학 이론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서예와 전통적인 시 형식인 와카(和歌)를 쓰는 데서 위안을 얻었습니다.
교토학파의 주요 사상가 중 한 명인 니시타니 케이지는 스승에 대한 추모의 글을 책으로 펴내어 니시다를 회고했습니다(니시다, 1991).
우리 시절 그는 항상 기모노에 목이 깊이 파인 구두를 신고 수업에 나타났다. 그런 조합은 처음 보는 것이라 이상했다. (나중에 짚신으로 갈아신었다.) 그에게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이마였다. 나는 다른 누구에게서도 그렇게 높은 이마를 본 적이 없었다. 마치 그의 얼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이미지는 암시적이지만, 현대 사진의 면밀한 검토를 완전히 견뎌내지는 못한다. 더욱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강의 스타일이다. 니시타니는 "어깨를 둥글게 하고" 앞으로 구부린 자세가 마치 그의 몸이 중심을 잡고 균형을 유지하는 방식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고 썼다. 그가 걷는 모습을 보니 그 인상이 더욱 확연해졌다. 그의 모든 부분이 활기차게 움직였고, 어깨는 이완되어 팔은 퉁명스러운 걸음걸이에 맞춰 자유롭게 흔들렸다. 그의 온몸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듯했고, 강의하는 동안 단상 위를 왔다 갔다 할 때 그 어느 때보다 더 활발했다. 이러한 신체적 활력은 그의 말에 특별한 활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니시다가 보통 30분 늦게 도착하는 특별 강의를 위해:
그는 단상에 서서 잠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제에 흥분한 그는 자신의 걸음걸이, 몸짓, 표정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 그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고, 가끔은 번개처럼 번쩍였습니다… 저에게는 마치 위대한 음악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때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고, 때로는 새의 날개처럼 날아오르는 듯했습니다. 그의 강의는 진정으로 제 영혼을 감동시켰습니다.
니시다의 강렬한 지적 노력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욕망과 "세속의 것들을 놓아버림"이라는 불교적 이상을 존중하고자 하는 욕망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더욱 복잡해졌고, 이는 그가 가족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된 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여덟 자녀 중 네 명과 첫 번째 아내는 오랜 투병 끝에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소나무와 고찰 사이를 거닐던 니시다의 활기찬 산책은 분명 그에게 어느 정도 위안을 주었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철학자들은 걷기가 생산적인 사고에 특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라파엘로의 유명하고 기발한 그림 "아테네 학당"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의 유일하게 "활보"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들은 페리파테틱스(Peripatetics), 즉 문자 그대로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알려졌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자들과 함께 철학을 공부하는 동안 걸었던 관행이나, 그들이 자주 이용했던 리케이온의 공공 산책로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18세기 후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걷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장 자크 루소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걷기의 기술에 관한 책을 집필했습니다.
칸트처럼 니시다는 혼자 걷는 것을 선호하고 필요로 하는 듯했다. 유사 교수는 "니시다는 친구나 동료들과 특별히 산책하러 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혼자 걸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산책의 주된 목적은 니시다 특유의 내면의 불안함과 다리를 쭉 뻗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산책하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유사 교수에 따르면 니시다의 산책은 두 시간 이상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특정 경로나 일반적인 경로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그녀는 이메일에서 니시다의 경로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추정되는 '테츠가쿠노미치(手学の道)'를 인용했습니다. 그는 이 경로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조용하고, 숲이 우거진 곳에 길이 나 있었고, 당시에는 차량 통행이 매우 적었을 테니까요. 또한, 길을 따라 호넨인, 난젠지, 은각사 같은 유명한 사찰들이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니시다에게는 이 길이 익숙하면서도 흥미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도쿄 소니 컴퓨터 사이언스 연구소의 켄 모기에 따르면, 니시다는 거의 매일 걷는 익숙한 산책길에 "지루해져서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철학자의 길의 베테랑인 모기는 모든 사람의 철학의 길은 "일상 생활에서 자주 걷는 길입니다. 영감을 얻기 위해 교토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걷기와 다른 형태의 운동은 뇌로 혈액을 공급하여 창의적인 사고에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 운동 자체에 과도한 집중이 필요하지 않다면 말입니다. 니시다의 산책은 "물론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고 니시타니 교수는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산책은 분명히 활동 속에서 일종의 은둔, 즉 명상 수련이나 킨신(kinshin)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산책은 그에게 새로운 아이디어, 즉 뇌보다 몸이 더 잘 이해하는 종류의 아이디어를 주었을 것입니다.
니시타니 교수는 니시다의 산책이 심오한 아이디어를 자극한 초기 사례를 기록했는데, 이 아이디어는 니시다의 모든 후속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순수하고 직접적인 경험이 외부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니시다가 가나자와를 산책하던 중 벌이나 등파리가 귀 근처에서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갑자기 순수한 경험의 관점에 대한 인식을 일깨워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기억납니다. 그것은 자신과 사물을 구별할 시간을 갖기 전, 직접 듣는 순간입니다.
철학의 길과 그 인근 사찰들을 따라 펼쳐지는 풍경과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는 여전히 경외감과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니시다는 나무들 위로 은각사(銀刻寺)의 위층을 살짝 엿보거나 호넨인의 무덤 사이를 걸으며 익숙한 풍경을 느꼈을 것입니다. 심지어 데츠가쿠노미치(鉄學の道)를 둘러싼 좁은 운하 기슭에 몸을 담그고 있더라도, 철학자는 상점과 주택들이 즐비한 이곳이 특정 시간대나 특정 계절에는 마치 집처럼 편안했을 것입니다. 그가 이곳에서 가장 깊은 사유를 하기로 했는지는 추측의 문제이지만, 니시다가 철학의 길가에 있는 낮은 돌에 (일본어로) 새겨 놓은 글귀가 단서가 될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두십시오.
나는 나다.
어쨌든 나는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건 내가 직접 만드는 거야.
1. 미치코 유사, 『선과 철학』(하와이 대학교 출판부, 2002, pp. 121-22)
2. 니시다 키타로. 니시타니 케이지 지음. 트랜스. 야마모토 세이사쿠(Yamamoto Seisaku)와 제임스 W. 헤이시그(James W. Heisig) 지음. 버클리: Univ. 캘리포니아 출판부, 1991년
지도 | 시시가타니 호넨닌니시마치, 교토시 사쿄구, 교토후, 606-8427, 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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